힐링캠프, 장례식같은 토크쇼, 그리고 예상못한 대형사고
일단 보자. 보고 이야기하자. 섣부르게 예상하며 대강 짐작하고 보지말자. 2012년 신년 특집이란 거창한 구호로 시작한 힐링캠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별 게스트로 여야의 유력한 대권 주자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 대책위원장과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초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기대와 우려, 의심과 감탄이란 감정이 오가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두 사람이 출연하기엔 힐링캠프만한 무대도 없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기도 쉬운 방송이라 생각했거든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4월의 총선, 12월의 대선이란 거대한 이벤트를 관통하는 올해. 누가 뭐라 해도 정치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2012년을 여는 데에는 이보다 적절한 접근이 없습니다. 게다가 50대의 이경규와 30대의 김제동,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그에 대한 지식, 그리고 경험은 아무리 출연자가 정치계의 거목이라 해도 그, 그녀의 말을 추종하고 맞장구치는 것에만 그치지는 않으리란 기대를 하게 해줍니다. 특별한 틀도, 코너도 없이 한 시간을 온전히 치유라는 주제에만 집중한다는 면에서도 이 프로그램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의외의 일면을 발견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형식은 자유롭지만 은근히 경륜이 있는 토크쇼. 힐링캠프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은 어쩌면 이런 정치인들을 초대했을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한 편으로 그렇기에 더더욱 위험할 수도 있기에 우려와 걱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토크쇼는 언제나 게스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면을 보여주는 것, 그 선을 절대 넘어서지 않습니다. 이런 제한선이 사전 협의에 의해 미리 그어져 있던지, 아니면 사후 편집을 통해 걸러내던지 간에, 우리가 토크쇼를 통해 전달받는 이미지는 언제나 의도된 것, 보여주고 싶은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한계 안에서 이경규와 김제동의 존재는 오히려 출연자들이 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공고화하게 해주는 수단이 될 위험이 큽니다. 바로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의 확산, 대중과의 접근성을 강화하기 위한 출연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뻔한 상태에서 두 재능 있는 예능인이 고작 수단으로만 활용될 것이란 것이 분명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과연 어떨 것인지. 보고 나서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몹시 흥미 있는 시도이기도 했고, 과감한 도전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땠냐구요? 역시 반반이었습니다. 힐링캠프와 MC들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름 민감한 소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놓기도 했고, 짐짓 대척점을 만드는 척 하기도 했고, 정치인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한 여러 장치들도 마련했고,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집중도 했습니다. 2주의 방송동안 힐링캠프는 정치인을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해놓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실험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혜진의 넉살과 의외성이 빛을 낸것처럼 MC들 역시도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구요.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용기, 과감함, 시도, 노력은 당연히 존중받고 칭찬받아야 합니다.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장점들도 많은 도전이었어요.
하지만 불편함은 의외의 부분에서 툭 튀어나왔습니다. 우리가 지난 2주 동안 만난 사람은 과연 박근혜, 문재인인가요? 아니면 박정희, 노무현인가요? 흥미로운 접근법에서 시작해 차분하지만 재미난 방식으로 각 개인의 매력을 탐구하던 힐링캠프는 토크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동일하게 두 초대 손님의 진솔함을 끌어내기 위한 접점으로 이미 떠나버린 사람의 그림자로서의 두 사람의 공통점을 건드렸고, 두 전직 대통령에게 시청자들이 가지고 있는 향수와 애착을 자극했습니다. 아버지와의 추억과 남겨진 자로서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박근혜와, 친구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운명에 갖혀버린 남자의 토로를 말하며 노무현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문재인 사이에서 그 문제들 다루는 시선은 차이점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확연히 다르고, 각각이 가진 개성과 장점 또한 차이가 있지만 힐링캠프는 그런 부분보다는 오히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는 빚진 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계적인 평등함을 취했습니다. 다소 비겁하고, 몹시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프로그램의 취지가 어떠하건 간에. 아무리 그것이 개인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었다고 해도 박근혜와 문재인 편을 보고 난 뒤에 남는 것이 결국은 박정희, 노무현에 대한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기억뿐이라는 겁니다. 마치 이미 떠난 자들을 그들을 통해 재확인하고 만나는 것만 같은 빗나간 초점. 힐링캠프는 초대 손님이 아닌, 게다가 이젠 살아있지도 않은 인물들을 중심에 놓으면서 마치 장례식 상주와 함께 고인을 추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살리기 위해 정치로 뛰어든 박근혜, 친구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으로 돌아온 문재인 그 이상의 무언가. 그들이 왜 박근혜이고 문재인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 고백이었거든요.
물론 예능은 예능일 뿐입니다. 웃고 떠드는 토크쇼에서 너무 심오한 깊이와 접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겠죠. 하지만 이런 의도적인 논점 회피는 도리어 이 두 정치인이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적나라하게 부각시켜 버렸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대선 레이스에서 만난다면, 그 프레임은 박근혜 대 문재인이 아닌 박정희 대 노무현이 되어 버릴 겁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여러 상반되는 가치를 대변하는 두 인물의 대리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우리는 고인의 대리인들이 주장하는 목표와 전망을 두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죠. 무엇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판단 이전에 스스로 홀로 서는 것보다는 고인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 버리는 정치인들끼리의 이런 식의 대결은 해결하지 못한 과거가 우리에게 부여한 몹시나 슬픈 비극입니다.
이것은 누가 더 빛이 났는가. 방송 내용이 뛰어났는가를 따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번 출연의 압도적인 승자는 이제야 제대로 된 소개를 받으며 대중 앞에 등장한, 첫 등장에서 제대로 사고를 치며 사람냄새를 폴폴 풍긴 폭풍간지 문재인입니다. 그는 드디어 활자나 소문, 사진을 벗어난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다음 주 대선주자 지지율이 궁금해질 정도의 예상못한 대형 사고였죠. 하지만 이런 화려한 데뷔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의 부상을 예견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으로 가득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기엔 뒷맛이 못내 씁쓸했습니다. 저는 과거를 잊지 않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 미래를 말하는 사람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혹은 그녀는 그럴 의지와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라도,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도록 유도했던 힐링캠프는 그럴 의도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빛나는 데뷔에 감탄하면서도 저에게 이 프로그램은 아쉬움을 진하게 남겻습니다. 정치의 해를 여는 무척이나 우울한 전주곡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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