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제동의 똑똑똑](11) 강우석 영화감독

관심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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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내 작품에 웃음은 필수… 사람 위하는 따뜻한 영화 됐으면”

상상력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압축해 담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로 소우주다. 두 시간 속에 인생을 압축하고, 감동과 재미를 조율해내는 영화감독은 한마디로 ‘소우주의 주인’인 셈이다. <공공의 적> 시리즈를 비롯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의 감독 강우석. 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처절한 현실을 특유의 유머코드로 풀어내는 저 감독은 분명 여성적이고 섬세한 감정선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대뜸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만들지만 내면은 여성적일 것 같다”고 했다. “어떤 현상을 보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선이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하죠. 예전에 제동씨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대답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데요?” 한국영화를 움직이는 거물 감독님이 나와 비슷한 표현법과 감정선을 가졌다니 나로서는 황송할 따름이다. 그러나 강 감독을 만나 갖게 된 희망은 다른 데 있다. 강 감독이 나이 서른여덟에 14세 연하의 부인과 결혼, 세 자녀 낳고 알콩달콩 산다는 사실. 서른일곱 노총각인 나에게 최고의 ‘멘토’였다.

한국 영화계에서 ‘흥행의 귀재’로 불리는 강우석 감독(왼쪽)과 김제동씨가 지난 5일 서울 충무로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오직 감독과 주연 배우에게만 허용되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감독님 만난다고 트위터에 올렸더니 누가 묻네요. ‘마초’시냐고? 영화 본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기도 하나봐요.

“아니에요.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해요. 지금 손대는 영화도 같은 맥락에 있는 건데요. 저보고는 엄숙하지 않은데 엄숙해 보인다고 하고, 난 내가 약하다고 느끼는데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센 사람인줄 알아요. 내가 강자인 줄 알고 상처주기도 하고…. 제동씨도 본인 생각과 달리 정치적으로 해석되잖아요? 그런데 지역구는 결정했어요?”

- 아이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감독님까지 그러시면 저 쓰러져요.

“당선 가능성이 높다던데 왜 고향인 영천서 출마 안하시고?”

- 영화적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추려면 아예 강남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해야죠. 하하. 지금 이거 감독님 인터뷰거든요. 감독님 얘기하죠?

“누가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제가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이 17편, 제작·투자·배급했던 게 130편이라더군요. 저 스스로도 놀랐죠. 흔히 영화계에선 대박쳤다면 감독이나 제작자가 다 번 줄 알아요. 그러나 회사가 200억원 벌었으면 난 2억원도 안가져가고, 나머진 영화 찍는 데 다 써요. 그래서 주변에서 바보냐는 이야기도 듣지요. 그래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대여섯명 찾아와 놀 수 있을 정도의 집에 살고…. 그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나머지 돈은 싹수가 보이는 후배들에게 많이 투자해요. 저 역시 이장호 감독님 같은 분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었죠.”

- 싹수 있는 후배감독을 굳이 꼽으라면요?

“<구타유발자들>을 만들었던 원신연 감독이죠. <세븐 데이즈>로도 솜씨 보였고, 지금은 <로보트 태권브이> 실사판 준비한다지요. 김상진 감독은 <투캅스3>를 망가뜨렸지만 그래도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으로 해내더군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영화는 <굿 윌 헌팅>이다.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하는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다. 어릴 때 외할머니는 내가 잠든 줄 아셨는지 “저 놈이 지 애비 잡아 먹은 놈”이라면서 한탄하셨다. 이후로 줄곧 아버지의 죽음이 내 잘못이라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 대사를 들으며 마음속 슬픔을 떠받치던 지붕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라이언 킹>에서 새끼 사자가 죽어가는 아빠의 품으로 파고드는 장면에서 힘들 때마다 아버지 산소를 찾는 나를 만났다. 그래서 영화는 마술적 주문이 담긴 ‘프리즘’이 아닐까.

▲ “분노·슬퍼하는 감정선 예민, 날 센 줄로 알지만 실젠 약해
200억 벌면 2억도 안 가져가… 싹수 보이는 후배들에 투자”
▲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 하는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다 - 김제동


- 이번 영화 <이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리는 것 같은데요.

“원작 있는 작품을 다시는 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작이 없다면 시나리오를 봐도 단순한 기대치밖에 없고 선입견도 없죠. 그런데 원작이 좋으면 그 기대치를 갖고 사람을 평가해요.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에게는 ‘윤신(神)’이라고 하면서 추앙하고 저에겐 ‘왜 당신이 이 작품을 영화로 찍으려느냐’ ‘뛰어난 원작을 망치려느냐’ 이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영화 찍기 전에 욕 얻어먹은 건 처음인데…. 그래서 생각했지요. 이 벽만 넘어서면 대박이다라고. 그 짓눌림에 오랫동안 시달렸어요.”

- 아마도 워낙에 그 만화를 사랑해서 그럴 거예요. 사실 (윤)도현이형도 뮤지컬 <헤드윅>에 출연하면서 앞서 연기한 조승우씨 때문에 시작 전부터 비슷한 비난에 시달렸대요. 형이 ‘내가 무슨 죄가 있냐’면서 괴로워하더라고요. 어쨌든 욕했던 사람들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겠다며 극장으로 몰려 올 것 같은데요.”

“그럴 것 같아요. 과거에 만화를 망쳐놓은 영화가 많았다는 방증이겠죠. 여하튼 16편 찍으면서 힘들었던 것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힘들었어요.”

- 영화를 아직 못봤지만 원작하고 조금 달라졌다는 데 대해 벌써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자신있어요. 윤태호 작가가 직접 엔딩을 썼는데 자신이 만화를 완성하기 전에 이 엔딩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원작을 마무리했을 거라고 했어요. 영화 나오고 난 뒤엔 ‘자기 글이 이렇게 옮겨질지 몰랐다’면서 정말 좋다고 울었지요.”

- 당장 다음주면 개봉인데 스트레스는 없나요?

“몹시 심하긴 한데 그래도 예측 가능해요. 워낙 많이 실패하고 많이 까먹어봐서 이번엔 어떻겠다 하는 감이 오죠. 아주 슬픈 상황이 올 것 같으면 지난주 이미 많이 울었을 텐데 이번엔 기본은 하겠다 싶어요.”

관객 몇천명을 대상으로 하는 토크콘서트를 앞두고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와주실지 조마조마한데 영화 개봉을 앞둔 긴장감은 예측하기 쉽지 않다. 보는 사람이야 별 생각없이 영화를 고르고 평가를 내리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피가 마르는 듯한 심정이리라.

- 다음 작품은 <글러브>라고 하셨죠? 청각장애인들이 야구하는 이야기를 다룬….

“충주 성심 청각장애인 야구단을 그리는 영화죠. 막상 시작하고 보니까 청각장애인들이 야구를 하는 게 말이 안될 정도로 어렵더라고요. 단순히 야구 영화가 아니라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다루고 싶어요. 또 일반인들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그들을 따뜻하게 쳐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제가 승엽이하고 청각장애인 야구선수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야구용품도 나눠주고 야구도 가르쳐주고 그랬는데 그때 본 아이들의 눈빛을 잊지 못하겠어요.

수년 전 승엽이와 <번지점프를 하다>란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동성애 코드가 있는 영화였는데 보수적인 대구 남자 둘이서 그걸 보고 난 뒤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극장에 불이 밝혀졌는데 남자 둘이 온 커플은 우리밖에 없었다. 승엽이는 “형, 우리 뉴질랜드는 가지 맙시다”하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 원작 ‘이끼’ 명성에 짓눌려… 이 벽 넘으면 대박이라 생각
윤태호 작가도 보고서 울어… 청각장애인 야구단이 차기작”
▲ 강 감독은 나이 서른여덟에 14살 어린 부인과 결혼, 세 아이 낳고서 알콩달콩 잘 산다. 서른일곱 노총각인 나에게 최고의 ‘멘토’였다 - 김제동


- 그런데 감독님 영화에는 왜 여배우가 별로 안나오죠?

“<공공의 적> 시리즈 때문에 그렇죠. 그전까지는 안나왔던 여배우가 거의 없어요. 데뷔작부터 하면 최수지, 박현숙, 이미연…, 최진실은 많이 했고 심혜진, 황신혜, 김성령…. 진짜 많았어요. 어느 순간 제작자와 투자자로 선회하면서 3년을 쉬다가 다시 감독으로 돌아온 게 <공공의 적>인데, 이 영화는 구조상 여배우가 나와봐야 어머니 역 정도? 그래서 그런지 여배우들이 저한테 인사를 안해요. 김윤진씨는 저더러 ‘이제 감독님 안기다려요. 어차피 여배우 안쓰시잖아요’라고 투정처럼 말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끼>는 오랜만에 여배우가 등장해서 그런지 VIP시사회에선 여배우들이 다들 와서 인사하더라고요.”

- 그럼 저도 여배우들 많이 오는 시사회에 어떻게 좀 불러주실 수 없을까요.

“제가 보기엔 제동씨는 여배우와 결혼합니다. 특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배우랑요. 내 나이가 올해 쉰하나, 집사람이 서른 일곱이에요. 서른여덟에 결혼해서 마흔에 애를 낳았으니까 집사람이 스물네살에 결혼한 거죠. 임권택 감독님도 사모님과 16년 차이거든요.”

- 그럼 전 지금 스물네살인 여배우를 찾아봐야겠네요.

“나도 서른여덟까지 뺀질거리다가 어느날 안성기형한테 전화해서 형이 소개해주는 여자면 아무나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대신 형수가 소개해주면 된다고 했죠. 그래서 바로 형수의 제자였던 대학원 1학년생과 소개팅을 했죠. 막상 나가기 전에는 말해 놓은 게 민망해서 ‘내가 형 얼굴 봐서 나가긴 하는데 1시간 후에 다른 미팅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연막을 폈죠. 그런데 그날 밥도 먹고 술도 마셨어요. 다음날 프러포즈하고 1주일 뒤에 그 친구 집인 안동까지 내려가 인사했죠. 한달 만에 결혼하고. 지금 봐요. 잘 살잖아요. 제동씨도 빨리 결혼해요. 나하고 닮은 애가 왔다갔다 하는 거 보면 살 만해요.”

헉. 나 닮은 애가 왔다갔다 하다니…, 상상이 안된다. 다른 건 괜찮지만 나보다 눈은 좀 더 컸으면 좋겠다. 다른 연예인들은 남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걸 피하기 위해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쓴다지만 나는 안경만 벗으면 된다.

- 감독님의 작품에는 항상 유머가 들어가는데, 웃음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강박관념이 있을 정도로 유머와 웃음은 반드시 있어야 해요. 전 집에 가서도 집사람이나 아이들이 웃지 않으면 불안하고 걱정될 정도예요. 전 특히 독특한 색깔과 깊이 있는 웃음을 만드는 사람을 아주 존경하죠. 제동씨가 진행하는 <환상의 짝꿍> 보면서 아이들 말을 받아 던지는 제동씨의 유머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고만고만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쎈’ 출연자 불러서 쪼다 만들어 웃기는 거랑 질적으로 달라요.”

- 흐흐, 그런데 다음주가 마지막 녹화입니다. 어쨌든 감독님은 영화로 많은 이야기를 해오셨는데요. 앞으로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있다면….

“사람을 위해주는 따뜻한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롱도 하고 풍자도 하고 끄덕끄덕 공감도 해주고…. 티격태격하던 부부끼리 와서 보고 나가면서 손잡고 갈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지요.”

사람들이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영화나 입담을 생산해 낸다는 데 있어서 나는 강 감독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왕이면 뒤늦게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행운도 겹쳐졌으면 좋겠다.

<정리 | 백승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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