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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위인 10명 지식머니 40

비공개 | 2011-07-29 11:13 | 조회 0 | 답변 7

저가 방학숙제로 우리나라 위인 10명을 조사해야 하는 데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3줄 정도 있으면 좋겠네요!!

내공 냠냠 하지 마시길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70 을 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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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네티즌 채택

Allen(full******) | 소개 | 답변

전문분야 : 수학,통계 (1위) | 영어 (26위) | 답변 11362 | 채택률 88.2%
본인소개 : 안녕하세요. 아는 거 다 알려드립니다.
10.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1.이순신(1545~1598)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또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 명랑대첩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2.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3.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인물사진

 

14.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15.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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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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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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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9.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20.광개토대왕 (375~413)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2011-07-29 12:54 | 출처 : 본인작성

질문자 한마디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 주은님 11.11.14

    숙제에 도움이 많이 됬어요.^^ 댓글 | 신고
  • 에스지코리아님 11.09.29

    감사합니다. 숙제에도움이많이되었어요..... 댓글 | 신고
  • 행복한 하루님 11.08.31

    쓰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ㅠㅠㅠ 좀 더 간편한 답변 부탁 할 수 있을까요? 댓글 | 신고
  • 라이플님 11.08.30

    저도 이거 방학숙제 인데 답변 하신분 덕분에 방학숙제 정말쉽게 끝나겠음 정말 고맙습니다. 답변한님 좋은일만 생기길 바래요^^ 댓글 | 신고
  • 강아지님 11.08.28

    근데 여기 글적은 분 한테 할말 있는데 왜 11개 적었어요? 위인10명인데 정말 이상하네? -강아지- 댓글 | 신고

남윤정(skad*******) | 답변 3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응응 저도 방학숙제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 나라 위인 10명 이상 조사하기! 에요.  꼭 알려주세요.  응응요..  알겠지요.. 

2011-08-28 20:35 | 출처 : 남윤정

나는 황석규 라는 인간이다(tige******) | 답변 62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10.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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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순신(1545~1598)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또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 명랑대첩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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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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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4.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15.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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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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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8.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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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20.광개토대왕 (375~413)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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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7:39 | 출처 : 본인작성

시나브로(c9***) | 답변 585 | 채택률 70.4%

활동분야 : 역사 (2위) | 사회 (2위)
본인소개 : 아동교육학사.유치원정교사2급

1.광개토대왕 (375~413)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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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수왕 (394~491)
  
고구려 제20대 왕(재위 413~491)으로 이름은 거련 ·연이며,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서 409년(광개토대왕 19) 태자로 책봉되고, 413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해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414년에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 퉁거우에 광개토왕비를 건립하였다. 427년(장수왕 15)에는 도읍을 퉁거우 지방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수왕 때의 고구려는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3.문무왕 (626~681)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으로 성은 김, 이름은 법민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맏아들로, 비는 파진찬 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외모가 빼어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나·당연합군으로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681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하였다.

 

 

4.고주몽 (동명성왕, BC 58~BC 19)
 
고구려의 시조(재위 BC 37∼BC 19)로 이름은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의 금와왕이 데려온 하백의 딸 유화가 낳은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활을 잘 쏘고 영특하여 왕자들이 시기해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해 졸본부여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5.박혁거세 (BC 69~AD 4)  
 
신라의 시조(재위 BC 57∼AD 4)이며 모든 박씨의 시조이다. 휘 혁거세. 왕호 거서간. 비는 알영부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 산곡간에 흩어져 살면서,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등 여섯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밑 나정 곁에서 말이 알려준 큰 알을 얻었는데, 깨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BC 53년 1월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이라 하였다.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이라 칭송하였다.


BC 37년 서울에 금성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4년 73세로 죽자 담엄사 북쪽의 사릉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의 남쪽이다.

 

 

5.연개소문 (?~665) 
 
고구려 말기의 장군 겸 재상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죽은 해는 《삼국사기》에 보장왕 25년(666)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인 남생의 묘지명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보장왕 24년(665)에 죽었다고 한다.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한편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남산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7.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8.계백 (?~660)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과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9.진흥왕 (534~576)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으로 성은 김,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법호는 법운이다. 지증왕의 손자이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비는 사도부인 박씨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태후, 즉 법흥왕비가 섭정하였다. 


백제 점령하의 한강 유역 요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576년 비로소 화랑제도를 창시했는데, 이것이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장차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10.을지문덕 (?~?)
 
고구려 명장으로 612년(영양왕 23) 수나라의 우중문 ·우문술이 113만여 명의 수륙양군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육군은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항전에 교착상태에 빠졌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 패강(대동강)을 거슬러 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일시에 섬멸당했다. 우중문, 우문술 등은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평양을 직공(直攻)하기로 하였다. 고구려가 평양성 공격의 위기에 봉착하자 을지문덕은 항복한다는 구실로 수나라 군대에 가 형세를 정탐하였다. 수나라 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하루에 7번 싸워 7번 거짓 패배를 가장하는 후퇴작전을 이용하여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귀신 같은 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라는 희롱의 시를 보내며 수군이 물러나면 영양왕이 수 양제를 알현하겠다고 하여 퇴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우중문이 지친 군사로 회군하자,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수나라의 후군을 무찔러 대승하였다(살수대첩).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11.김만중 (1637~1692)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시호는 문효이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헌납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 창협의 비위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되었다. 이듬해 박진규·이윤수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등이 있다.

 


12.손병희 (1861.4.8~1922.5.19)  
 
우리 나라 근세의 사회사상가. 동학의 제3대 교주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중흥시켰고, 3ㆍ1 독립운동을 영도한 민족 지도자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북접 통령이 되어 남하, 전봉준과 합세하여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동학 봉기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진보회'를 조직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찬성하자 이에 격분하여 귀국해서, 동학당으로서 매국노가 되었다 하여 이용구 등 70여 명을 출교시키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스스로 정통 제3대 교주가 되었다.


그 후 국내 각지에서 육영사업을 펼치는 한편, 교도 연성사업으로 항일투쟁의 조직과 훈련을 지도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혁명에 의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휩쓸자 국내외 여러 지사들과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지도자로 추대되어 33인의 필두 서명자가 되었다. 그는 동학의 교지를 민족 사회운동에 실천한 사람일 뿐 아니라 동학의 교리를 현대적으로 전개한 사람이다.

 

 

13.안중근(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14.안창호(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우리민족에 긍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의 농장이나 오랜지농장들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잘살수있도록 도와주었다. 1907년에는 비밀조직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선생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평양에 세운것으로 청년들에게 고등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언론활동도 했다. 신민회에서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으로 인해 더많은 민족기사를 쓸수있었다. 그는 청년학우회를 새워 청년들을 키우는데 힘썼고 한일 합방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국무총리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으며,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지만 적발되어 그후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 

191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모습

 

15.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출생)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 광복단 가입,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20년 10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이다. 만 4일간 10차례의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2천여명, 독립군 희생자는 1백여명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을 한 김좌진의 애국심은 본받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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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김구 (1876~1949)

 

김구는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이준, 이동녕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반대파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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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이봉창(1900~1932)

 

이봉창은 1931년 중국 상하이 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 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는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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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홍범도(1868~1943)

 
홍범도는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윤봉길(1908~1932)

 

윤봉길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21.신채호(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그의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1930년 5월 대련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하였다.
신채호
 
22.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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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이순신(1545~1598)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또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 명랑대첩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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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인물사진

 

25.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26.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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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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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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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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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2011-09-17 22:12 | 출처 : 본인작성

부모를사랑해요♥ | 답변 17 | 채택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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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2011-09-26 20:12 | 출처 : 본인작성

sky0220(dbs****) | 답변 1512 | 채택률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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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위인 10명

 

1.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2.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우리민족에 긍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의 농장이나 오랜지농장들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잘살수있도록 도와주었다. 1907년에는 비밀조직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선생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평양에 세운것으로 청년들에게 고등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언론활동도 했다. 신민회에서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으로 인해 더많은 민족기사를 쓸수있었다. 그는 청년학우회를 새워 청년들을 키우는데 힘썼고 한일 합방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국무총리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으며,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지만 적발되어 그후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 

191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모습

 

3.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출생)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 광복단 가입,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20년 10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이다. 만 4일간 10차례의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2천여명, 독립군 희생자는 1백여명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을 한 김좌진의 애국심은 본받을 만 하다.

 

4.김구 (1876~1949)

 

김구는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이준, 이동녕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반대파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5.이봉창(1900~1932)

 

이봉창은 1931년 중국 상하이 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 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는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6.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7.홍범도(1868~1943)

 
홍범도는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8.윤봉길(1908~1932)

 

윤봉길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9.신채호(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그의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1930년 5월 대련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하였다.
신채호
 
10.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사단법인청소년선도위원회-청소년보호사이버캠페인]

2011-10-11 17:11 | 출처 : 지식글

러브ㅋㅋ(si8***) | 답변 1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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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안중근, 단군, 계백장군, 허 준, 김홍도, 유관순, 문익점, 신사임당, 이순신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위인도 한, 두줄밖에 몰라서 죄송합니덩.... 근데 계시판에 글은 어떻게 올립니까?

저도 답변 부탁... 히

 

2011-10-14 15:22 | 출처 : 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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